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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종사 도전기/자가용조종사(PPL)

[ep.11]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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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비행 훈련생들은 훈련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매주 월요일에 회사에 보고해야 했다. 반장은 훈련생들이 한 주간 훈련 진도와 비행시간이 어떤지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고했다. 그리고 매주 운항훈련팀장에게 전화를 드려야 했다. 우리 기수의 반장은 나와 같은 숙소에 살고 있는 문정호였다. 

문정호는 동기들 중에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것은 아니고 한두살 터울이긴 했지만. 게다가 빠른 년생이라 실제로는 몇 개월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IT 계열 기업을 다니다 이직을 했다고 본인을 소개했지만 알고 보니 타 항공사에서 정비사로 일하다가 이직을 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문정호가 이야기한 본인의 신상 정보 같은 내용이 가끔 거짓일 때가 있었다. 출신 학교라던지, 빠른 년생이라던지 하는 정보들이 약간씩 부정확했다. 애초에 문정호는 자기 이야기를 잘 말하지 않았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자신에 대해 오픈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리스키 한 행동이다. 사회 경험이 있었던 그는 이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반면에 나는 그런 면에서 많이 미숙했다. 

사실 문정호도 초기 비행교육 과정에서 애를 먹고 있었다. 교관과 트러블이 있어서 학교에 요청해서 교관을 바꿨다. 그럼에도 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나 보다. 문정호도 나와 같은 시기에 progress check 1 에서 fail 했다. 문제는 문정호가 반장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자기가 fail한 사실을 스스로 회사에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회사에 보고하지 않았다. 본인은 아직 progress check 1 심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했다. 웃기는 것은 나의 fail 사실은 회사에 보고를 했다. 즉, 나와 문정호 모두 심사를 받고 떨어졌지만 떨어진 사람은 나 한 사람 만으로 보고를 한 것이다. 

문정호는 이 사실을 우리 동기들에게 숨기려 했지만, 회사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고 싶어한 동기들에 의해 밝혀졌다. 문정호는 궁색하게 변명을 했다. 자기는 조건부로 다시 한번 체크를 받기로 되었다는 것이다. 말만 교묘하게 바꾼 것이지 엄연히 fail 인 것이었다. 문정호는 본인과 나의 경우는 명백히 다르다며, 본인은 나보다 어떤 점에서 비행 교육적으로 나은지를 분연히 설명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나는 더욱 염증이 났다. progress check 1에서 떨어지면 짐 싸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마음을 굳혔다. 파트너인 최상훈과 밤새 많은 이야기를 했다. 최상훈은 나를 붙잡았다. 자기가 도와줄 테니 한 번만 다시 해보자고 했다. 우리 동기들 모두가 힘들고 예민해 있었다. 어떤 이들은 progress check를 통과해서 solo 비행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축하를 해주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잘하는 것이 있고, 좋아하는 것이 있다. 이 두가지가 같으면 그것은 축복받은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나마 내가 잘하는 것은 집중해서 어떤 것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초기 비행교육 단계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집중력이 좋다는 점이 해가 되기도 했다. 어느 하나에 집중을 하다가 다른 것들을 놓치게 되니 말이다. 비행 교육생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 중 하나인 Fixation이다. 오히려 주의가 산만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멀티태스킹 능력이 좋은 사람이 비행에 더 적합했다. 문제는 내가 여전히 비행을 하고 싶고 좋아했다는 점이다. 

며칠간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피트에게 몸이 좀 안좋아서 비행교육을 쉬고 싶다고 말하고 혼자서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후회를 할 것 같았다. 훈련비와 어려운 집안 사정도 걱정이 되었다. 

인생도 비행과 마찬가지로 의사결정의 연속체다. 기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올바른 의사결정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의 순간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선택의 결과는 본인이 짊어지는 것이다. 며칠간 고민하다가 더 후회 없을 것 같은 쪽으로 결정을 했다. 며칠 후 나는 학교에 가서 다시 progress check 일정을 잡아달라고 했다. 몇 번의 보충 교육을 받았고 미숙한 랜딩을 가다듬었다. 피트도 내게 더는 가혹하게 굴지 않았다. 나도 이렇게 된 이상 더욱 최선을 다했다. 며칠 후 왈리와 다시 한번 progress check 1을 받았고 그에게서 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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