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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사의 일상 생활

890일 만의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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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박 3일 홍콩 비행. 제 비행 로그는 2년 반전의 기록에서 멈춰있었습니다. 890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이, 의미 없이 보낸 것 같았는데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기도 했었습니다. 오랜만에 출근 준비를 하다 보니 전에는 일상이던 것들이 새롭고 낯설었습니다. 옷장 안에 있던 유니폼도 낡고 잘 안 맞는 것 같아 새로 지급을 받았습니다. 베란다 한편에 두었던 비행 가방은 먼지가 수북이 쌓여서 제거하고 닦아내는데 꽤나 힘들었습니다. 

달라진 것과 그대로인 것

집 앞 정류장에서 매번 타던 공항리무진 버스는 더 이상 운행을 하지 않습니다. 입사 초기교육을 받으며 탔던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10년 전 그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익숙하면서도 조금씩 바뀐 인천공항의 모습. 자주 가던 몇몇 음식점들이 모습을 감추었고 영화관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도 수백번은 걸었던 길이라 몸이 알아서 기계적으로 승무원 대기실로 향했습니다. 

???

있어야 할 곳에 승무원대기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헤매다가 동료 조종사에게 전화를 해서 간신히 길을 찾았습니다. 코로나 전에 사무실 이전을 했었는데, 그 사무실은 몇 번 안 가본 곳이라 기억에서 잊혔던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승무원 대기실로 가보니 그제야 그곳에 대한 기억이 났습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너무 잘 잊히고 왜곡돼버리는구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잘못을 깨닫기 전에는 왜곡된 기억을 너무나도 철석같이 믿는다는 것도 놀랐습니다. 

쇼업을 하고, 브리핑을 하고 그리운 조종석에 드디어 앉아보았습니다. 감격적이었습니다. 언제 다시 앉아보려나 생각을 했었는데. 890일이 걸렸네요. 

'2년 이상 단절이 되었던 경험이 또 있었나' 하고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기억은 군입대더군요. 그때는 시간이 참 안 갔는데 벌써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나 싶어 우습기도 하더군요. 

890일. 2년 반 남짓한 시간. 이 시간이 제게 남긴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동안 저는 얼마나 변하고 성장하고 성숙해졌을까요? 

2년의 공백기를 다시 채우고, 비행자격을 살리기 위한 '재자격 훈련'을 받으면서도 늘 하던 비행 프로시져와 조작, 비정상 절차들을 다시 익히는데 꽤나 많은 공부와 반복 학습, 훈련들이 필요했습니다. 잘못된 기억들을 다시 수정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많이 달라진 것 같긴 합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고, 가족에 대한 생각, 직업관, 많은 것들이 바뀌었네요. 사회에서 보는 조종사에 대한 시선도 전과 같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890일은 제 정체성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조종사로서의 제 정체성은 그저 일면일 뿐 '제 삶의 모든 것은 아니구나, 아니어도 괜찮구나'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동시에 '조종사로서 사는 삶'이 얼마나 제게 있어 중요한 것인가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저는 '조종사로 살지 않아도 좋고, 조종사로 살아도 좋다'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조종사로 살아도 좋고 살지 않아도 좋다.

890일 만의 출근. 어쨌든 다시 비행을 시작합니다. 정지된 자격을 되살리기 위한 훈련과 체크 비행에 집중하다 보면 또 바빠지고 제 정체성은 모호해질 수 있겠지만... 

'새로운 첫 날' 의 묘했던 감정들을 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글로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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