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순간은 언제나 특별하다. '처음'이라는 말에는 설렘과 긴장감이 있다. 지금은 10여 년의 민항사 조종사의 경험으로 비행시간이 수천 시간이 되었지만 내게도 처음 비행을 했던 순간이 있었다. 첫 비행의 기억이 설레고 즐거웠냐 하면 사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지금은 희미해져 버려 첫 비행을 회상하자면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오르는데 그마저도 첫 비행 때의 기억인지 그 후의 비행교육을 받던 기억들이 섞여버린 것인지 확실치 않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내가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에 시간이 휙 지나가 버렸던 것은 기억이 난다. 여유롭게 주변 광경을 보며 경치를 즐기고 교관과 간간히 잡담을 나누고 이런 겨를은 없었다. 말 그대로 쏜살같이 시간이 지나갔고 영혼이 가출한 몰골을 하며 비행기에서 내렸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방대한 양의, 그것도 다양한 종류의 정보량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비행기 조종간(yoke)의 조작감, 컨트롤 타워의 교통관제지시, 교관이 떠드는 소리, 3차원으로 이루어진 공간감, 그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시끄러운 프로펠러 소리...
'망각'이라는 것이 인간의 자기보호 기작이라는 내용을 책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힘들었거나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고 희미하게 만들어 사람이 삶을 견딜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비행교육을 받았던 기억들은 내 기억 체계에서 많은 부분 희석되고 망각되었다. 그 당시엔 너무 힘들고 견디기 어려웠다. 애석하게도 오래 기억하고 싶은 특별한 기억들도 함께 잃어버렸다.
그렇게 첫 비행이 끝났다. 뒤죽박죽 정리안된 컴퓨터 폴더들을 하나씩 열어가며 파일 정리를 하듯 여러 기억의 조각을 열심히 끼워맞쳐 연결해서 그날을 회상해 보고자 한다.
the First Flight
세스나 172(Cessna 172 skyhawk). 내가 PPL과 IR 교육과정에서 탄 비행기다. 단발 프로펠러기로 High wing(날개가 위에 달려있는)이라 비행안정성이 좋지만, low wing에 비교하여 착륙이 어렵다. 활주로까지 오면 그라운드 이펙트(Ground effect) 때문에 둥둥 떠다니는 특성이 있어 착지가 어렵다.
첫 비행이 있던 날, 편조인 최상훈과 나는 이른 새벽에 학교에 도착해 비행준비를 했다. 교관 피트가 오기 전에 비행준비를 해 놓아야 했다. 겨울의 애리조나는 한국만큼 춥지는 않았지만 새벽에 해가 늦게 떴다. 먼저 기상을 체크해야 한다. 비행학교는 애리조나 피닉스에 위치한 디어밸리 공항(the Deer Valley airport)에 있었는데 공항에서는 매시간 정시에 측정된 기상을 알려준다. 공항마다 기상을 알려주는 주파수가 있는데 수신기에 이 주파수를 맞추면 라디오 녹음으로 공항의 기상을 알려주는 방송을 들을 수 있다. 이것을 ATIS(Automation Terminal Information Service)라고 한다. 기상을 적고, 오늘 내가 탈 비행기의 중량과, 연료량, 사람 몸무게를 계산해서 그날의 항공기 중량 배분과 무게중심을 구한다 (Weight & Balance). 비행기는 자동차처럼 탈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구겨서 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제한된 중량과 무게중심의 위치가 있기 때문에 매 비행 전에 이 계산을 하는 것이 안전에 필수적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에 포스팅한 글을 참고)
https://freedompilot.tistory.com/27
그리고 주기장으로 나가 오늘 탈 비행기 외관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고장나거나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fuel이나 oil이 누출된 곳은 없는지, 날이 추워 날개면에 서리가 끼지 않았는지, 각종 지시계의 측정부가 이물질로 막히진 않았는지를 확인한다. 이때 점검할 부분을 빠뜨리지 않고 체계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반드시 checklist에 의거해서 점검을 한다. 이것을 Exterior walk around check이라고 한다.
이렇게 기상, Weight & Balance, Exterior walk around check 까지 마치면 비행 전 준비가 된 것이다.
비행은 최상훈이 먼저하고 나는 백싯(back seat)을 했다가 두 번째로 하기로 했다. 비행 전에 최상훈이 먼저 비행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사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최상훈의 비행을 먼저 지켜보고 비행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좋았다. 피트는 우측석에 앉아서 최상훈과 내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체크리스트의 순서에 따라 비콘 라이트를 켜고 믹스쳐를 넣고 시동키를 돌려서 엔진 시동을 걸었다.
"Clear Prop!"
피트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크게 소리쳤다. 시동을 켜서 프로펠러가 돌 때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주변에 알리는 것이다. 푸드득 푸드득 프로펠러가 천천히 돌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돌았다. 파킹 브레이크를 풀자 비행기가 서서히 앞으로 나갔다. 피트가 조종간에 달린 무전기 스위치(Communication switch)를 누르며 공항 관제탑과 교신을 했다.
"Good morning, Dear Valley tower, Cessna 1856U, Ready for departure"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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