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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종사 도전기/자가용조종사(PPL)

[ep.5] 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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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과의 만남

미국 출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선배들이 귀국했다. 1년 먼저 비행 교육을 받은 선배들이 돌아온 것이다. 선배들은 우리에게 비행교육과 미국 생활에 대해서 생생한 정보들을 들려주었다. 비행교육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학교의 분위기는 어떤지, 교관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으며 좋은 교관, 나쁜 교관은 어떤 사람들인지, 미국 생활은 어떻게 했는지 등등을 말해주었다. 비행 교육을 갓 마치고 온 선배들이라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불안감과 긴장감들도 함께 보였다. 그 선배들 동기 중에 미국 비행훈련의 막바지에서 낙오한 선배가 있어서 그래 보였던 것 같다. 같이 동거 동락하며 1년여 기간을 함께했던 동료가 갑자기 짐을 싸고 돌아간 것이다. 회사라는 조직의 시스템은 여지나 융통성이 없다. 부탁하고 사정할 기회도 없었다. 미국에서 계약해지 통보를 들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규직이 아닌 '인턴'이라는 신분의 훈련생이기 때문이다.

돌아온 선배들도 훈련의 긴 여정 중 반 정도를 갓 마친 것이다. 앞으로의 훈련에서도 여러 고비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또 누가 탈락할지 모를 일이었다.

출국

그리고 시간이 흘러 드디어 출국하는 날.
이민가방 같은 큰 캐리어를 끌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배웅하러 온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동기들이 보였다. LA를 거쳐 애리조나로 가야했다. LA까지는 우리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갔다. 우연히도 오늘 비행은 운항훈련팀장이 기장으로 임무를 하는 비행 편이었다. LA에서 비행학교 관계자들과 대면하게 되는데 첫인상을 좋게 해야 한다며 정장을 입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장을 입고 비행기를 타야 했다. 긴 비행시간 동안 정장을 입어야 하는 게 사실 이해는 안 되었지만 하라니까 그렇게 했다.

나를 배웅하러온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탑승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타니까 새삼 실감이 났다. 이제 가는구나.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선배들이 말해줬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Nothing I can do. 비행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운빨입니다. 시험 보는 날 비행기도 좋아야 하고, 날씨도 좋아야 하고, 교육받는 교관도 좋아야 하고, 어떤 체커에게 받는지도 중요하고.. 등등 다 내뜻대로 할 수가 없어요. 우리 동기 중에 떨어진 친구 알죠? 그 친구 비행 잘했어요. 비행을 못해서 떨어진 게 아니에요. 그냥 시험날 운이 안 좋았던 거예요."


이런 말을 하는 선배도 있었다.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했는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그냥 우리를 겁먹게 하고 골탕 먹이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뭔가 부조리함을 느껴 비판을 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냥 기분이 나빴는지. 하지만 듣는 우리 동기들 입장에선 그런 말들은 심리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그런 말들을 포함해서 내가 이 여정을 잘 마칠 수 있을지, 앞으로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뭐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창밖을 봤던 것 같다. 탑승 수속하던 게 오후였는데 어느덧 노을이 져 인천공항은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활주로를 달리고 이륙했다.

훈련팀장

회사 출장 티켓이지만 인턴 훈련생에게 일반석을 주는 건 당연했다. 퍼스트나 비즈니스 같은 상위 클래스 좌석은 생각도 안 했었다. 그런데 승무원이 비행 중에 우리를 비즈니스 쪽으로 불렀다. 가보니까 운항훈련팀장님이 갤리 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항훈련팀장. 면접 때 깐깐해 보이는 인상으로 내게 추가 질문을 했던 사람이다. 대형기 기장이기도 하다. 항공대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공군에서 하면서 수송기를 탔다. ㅇㅇ항공에 들어와서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주요 기종에서 기장을 하며 훈련팀장이라는 보직도 수행했다. 같은 항공대 출신인 운항본부의 임원 중 한 명의 라인이어서 차기 임원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회사 내에서 지배적이었다. 그만큼 출세욕도 강했고 의욕도 넘쳤다. 본인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좋아하고 상황이 본인의 통제하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훈련생들이 미국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지를 매주 보고받고 세세한 것 하나까지도 보고받기를 원했다. 모든 일을 원칙에 입각해서 처리하는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이기도 했다.

우리는 운항훈련팀장님을 앞에 두고 빙 둘러서서 마치 학익진으로 배열하듯 섰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열중 쉬어 자세로 섰다. 정장을 입은 성인 남자 십여 명이 좁은 비즈니스 갤리에서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미주노선 같은 장거리 항로에는 기장-부기장 편조가 두 세트 배정되는데 훈련팀장님은 후단, 그러니까 착륙을 담당하는 임무였다. Rest를 하는 중에 잠깐 우리를 부른 것이다. 팀장님은 미국에서 교육을 무사히 잘 받고 오라며 격려의 말씀을 길지 않게 하셨다. 마침 자기 비행기에 이렇게 훈련생들이 탄다는 이야길 듣고 얼굴이나 한번 보고 좋은 이야기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 불렀다며 언제나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할 말만 하신다. 하지만 전혀 편한 상대는 아니셨다.
짧은 담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야 좀 편한 옷으로 환복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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