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합격 발표가 있던 날. 아침부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몇 달 동안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감정의 기복은 들쭉날쭉하였다. 이제 오늘이면 어떤 식으로든 이 마음고생이 일단락이 될 것이다. 합격자 발표는 오후 5시에 홈페이지에서 확인이 가능했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갔다. 오후 5시에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축하합니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얼떨떨했다. 엄청나게 이루고 싶었던 무언가를 이룬것인데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기보다는 생각보다 무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내 성향의 문제기도 했다. 나는 어떤 목표를 위해 매진할 때는 그 목표를 엄청나게 갈구하다가도 막상 이루고 나면 무덤덤하게 느끼곤 하였다. 막상 힘들게 이루고 나면 그 과정이 시시해지기 때문인 건지, 혹은 감정을 너무 억제하고 살아서 내 기분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머리로는 아주 기쁘고 행복했지만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한 채 무덤덤한 상태로 있었다. 이런 기분은 이때로부터 2년 정도 후에, 부기장으로서 최종 임명되던 그때도 비슷하게 느꼈었다. '입사전형 최종 합격'은 2년 남짓한 비행훈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마디로 나는 '성취감'이라는 감정이 많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첫 출근, 그리고 입사 동기
처음 자기소개서를 쓰던게 눈이 하얗게 쌓인 1월경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더워서 반팔을 입어야 하는 7월이었다. 입사전형은 거의 반년에 가까이 진행됐지만 막상 출근은 합격 발표로부터 일주일 후부터였다. 일주일 동안 서울에 살 집을 구하고 준비들을 해야 했다. 공항에 위치한 ㅇㅇ항공사 본사에서 가까운 5호선 발산역 근처에 원룸을 구했다. 이쪽 강서구 지역에는 항공사 종사자들이 많이 산다.
설레는 기분으로 첫 출근을 했다. 면접자로 몇 번 왔던 길을 이제는 사원으로 가는 것이다. 대회의실 같은 곳에서 입사자들이 모였다. 10여명의 조종사 인턴들이 입사했다. 입사동기였다. 2차 신검이 끝나고 술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던 사람들 중 몇 명은 보이지 않았다. 2차 신검에서는 떨어지는 일이 없다던 후기가 틀렸던 것이다. 그때는 잘 몰랐다. 입사동기들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비행 훈련 타임 스케쥴과 훈련비
약 일주일 정도의 신입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운항훈련팀 소속으로 배치를 받았다. 훈련팀 실무자께서 오셔서 앞으로 일정들을 설명해 주셨다. 비행 조종 훈련을 마치고 민항기의 부기장으로서 조종사가 되려면 약 2년의 기간이 예정되어 있었다. 약 1년간은 미국에서 기본 면장이라고 불리는 자가용 조종사(PPL), 계기비행 증명(IR), 사업용 조종사(CPL)의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민항기 조종사로서 교육을 받는데 1년의 기간이 더 걸린다. 이 기간에는 미국의 면장을 한국 면장으로 전환하고, Jet 비행기 자격증도 따고, 항공사에서 운용하는 비행기 기종의 자격도 취득하는 등 의 교육을 받는다.
미국 비행 훈련 기간동안 발생하는 훈련비는 훈련생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당시의 환율로 계산해서 훈련과 미국 생활에 대략 1억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 물론 나는 그런 큰돈이 없었다. 회사와 연계된 시중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훈련비를 충당하고 후에 부기장이 되어서 이를 상환하는 방법이 있었다.
'인턴'으로 입사를 해서 훈련생 신분으로 2년동안의 훈련을 무사히 마쳐야 정규직인 조종사, 부기장이 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각 단계 단계별로 평가가 있고 평가에서 2회 이상 떨어지면 퇴사를 해야 했다. 훈련비라는 막대한 빚과 함께. 실제로 내 윗 기수 선배 중에 이런 식으로 비행 훈련을 다 마치지 못하고 퇴사를 한 선배들이 몇몇 있었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1억 가까운 빚을 지고 실직이 되는 상황.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 당시의 나는 그 모습을 상상하니 절망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실패가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실제로 그 선배들도 나중에는 다 잘되셨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입사했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은 없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비행 훈련을 기준에 맞게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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