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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종사 도전기/계기비행증명(IR)

[계기비행 ep.7] 선선발 제도와 비행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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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반, 내가 다니던 비행학교는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비행교육을 위한 비행기가 부족할 정도로 학생들이 많았다. 그중 한국 학생들이 꽤 많이 있었다. 

우리 비행학교의 한국 학생은 '선선발 제도 훈련생' 과 '비행 유학 훈련생'으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선선발 제도와 비행유학 

'선선발 제도'란, 나처럼 항공사에 계약직 비행 훈련생으로 먼저 입사를 한 후 비행교육을 받고 교육을 무탈히 잘 마치면 정규직인 부기장으로 임명되는 제도를 말한다. (내가 다니던 때만 해도 '선선발제도'라는 용어조차 잘 사용하지 않았다. 현재는 많은 항공사들이 이 개념을 도입하면서 선선발 제도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비행 유학'은 항공사에 입사하기 전에 비행학교에 개인적으로 등록해서 비행교육을 마치고 기본 면장을 취득한 후 항공사 채용을 도전하는 방법이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에 비행교육시설이 많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미국 같은 항공 선진국으로 비행 유학을 많이 가던 시절이다. 

'비행 낭인'

비행 유학은 선선발제도에 비해 리스크가 조금 더 높다. 선선발제도는 비행훈련만 무사히 마치면 항공사 정규직 채용이 보장되는 것에 반해 비행유학은 기본 면장을 취득한 후에도 항공사 입사라는 관문을 다시 한번 넘어야 한다. 1억 원가량의 비행 훈련비를 쓰고 나서도 항공사 입사를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언론 등 미디어 매체에서는 소위 '비행 낭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시낭인이라는 말에 빗댄 신조어였는데 이제는 많이 통용되고 있다. 

내가 교육받던 미국 애리조나의 비행학교는 우리 회사의 선선발제도 위탁교육이 진행되는 학교라는 사실이 알려져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회사가 위탁교육을 맡긴다는 것은 비행 학교의  커리큘럼과 교육 수준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검증된 학교라는 말이다. 비행학교에서는 그래서 우리(나 같은 선선발제도 위탁교육 조종훈련생들)들이 특별했다. 선선발 학생들의 비행훈련 성과가 좋아야 계속해서 위탁교육 학교로 계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선선발 학생들을 케어해줬다. 진도나 훈련에 지장이 없도록. PPL 과정에서 훈련에 뒤쳐졌던 나도 학교의 배려를 많은 부분 받은 것이다. 또 비행기 배정이나, 스케줄, 교관 배정 등에서 선선발 교육생들을 먼저 배정했다. 이런 상황에 일반 비행 유학생들의 불만이 있기도 했다. 같은 교육비를 내고 교육을 받는데 위탁교육생들은 특혜를 받았고, 일반 비행 유학생들은 그로 인해 피해를 받게 되니 말이다. 비행 유학은 시간이 돈이다. 훈련기간이 늘어질수록 비용은 계속 증가한다.

애리조나의 여름에 비행을 한다는 것

나는 비행기 배정도 좋은 시간대를 받았는데, 대부분 오전 시간에 매번 비행을 할 수 있었다. 애리조나의 여름에 비행을 한다는 것은 지열과의 싸움이었다. 정오 무렵이 되면 온도가 섭씨 40도를 넘는다. 활주로에서는 육안으로도 아지랑이가 보인다. 지면 근처의 불규칙한 기류는 학생조종사들이 착륙하는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비행기를 착륙해야 하는데 착륙이 되지 않고 둥둥둥 활주 로위를 떠다니게 된다. 게다가 연습용 항공기에는 에어컨 같은 장비가 없기 때문에 찜통 같은 더위에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이 나곤 한다. 집중력을 빼앗기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학생조종사들은 아직 지면이 달궈지기 전인 새벽~오전 시간에 빨리 비행을 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비행학교는 일단 오전 시간의 대부분을 우리 위탁교육생들에게 할당을 해 주었다. 

 

 

그렇다고 선선발 훈련생과 비행 유학생들의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모두 타국에서 힘들게 비행교육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서로 도와주고 정보 교류하고 친분을 쌓았다. 그렇게 만난 인연 중에 '안정훈(가명)' 훈련생이 있었다. 나보다 한 살 형이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기 때문에 아파트 라운지에서 가끔 만나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항공대를 졸업했지만 비 운항과였던 그는 조종사가 꼭 되고 싶어서 유학을 왔다고 했다. 

그때의 우리는 참 불안했다. 나는 선선발제도로 왔지만 비행을 잘 못하는 나 자신이 불안했다. 큰 빚을 안고 훈련에서 중도 탈락하는 불안함에 종종 악몽을 꾸던 때였다. 정훈이 형은 그런 나를 부러워했다. 선선발제도라는 보장(?)된 신분이니 비행훈련에만 전념해서 자기만 잘해내면 조종사가 될 수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정훈이형은 미국에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 조종사로 취업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다. 나는 나대로 비행을 잘하는 정훈이 형이 부러웠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부러워했다. 시기와 질투를 할 여유는 서로 없었던 것 같다. 

선선발제도나 비행 유학 모두 장단점이 있다. 선선발제도는 모든 훈련 일정이 매주 회사에 보고된다. 진도가 느린지 빠른지 교관들의 코멘트가 어떤지 등등. 그리고 훈련 중 체크를 많이 떨어지게 되면 중도 탈락한다. 이런 과정이 훈련생들에게는 과도한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비행 유학은 이런 점에서 조금은 자유롭다. 항공사 입사를 할 때 비행 로그북을 제출하고 비행기록을 점검받지만 선선발제도 학생들이 받는 만큼  꼼꼼히 체크받지는 않는다. 

나중에 정훈이 형은 우리 회사에서 입사해 부기장이 되었다. 나보다 일 년 정도 늦게 부기장이 되었으니 후배인 셈이다. 지금은 다른 기종에 있어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가끔 일정이 겹쳐 레이오버 호텔에서 만나면 술 한잔 하며 옛이야기들을 했다. 불안한 20대 청춘이었던 우리의 모습이 지금은 그립기도 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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