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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종사 도전기/자가용조종사(PPL)

[ep.4]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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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본격적인 비행교육을 받으러 가기 전에 한 달여 기간 동안 '그라운드' 교육을 받았다. 그라운드 교육이란 비행 이론, 기상, 관제용어 같은 것들을 배우는 것을 말한다. 공학을 전공한지라 비행 이론 같은 것들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실제로 비행을 하면서 이런 것들을 적용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당시 나는 자동차 운전도 미숙한 장농면허 소지자였다. 그리고 토종 한국인으로서 영어는 학교에서 글로 배운 것들이 다였다. 그런 내게 한 달 후 미국으로 가서 비행기 조종법을 영어로 배워야 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거기에 비행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큰 빚을 진 실업자가 되는 상황까지 덤으로 말이다. 성격이 대범하고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래, 까짓것 부딪혀 보자!'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현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항공사는 매우 보수적인 분위기의 집단이다.  IT기업이나 스타트업같이 창의성이 중시되는 집단이 아니다. 특히 조종사는 더욱 그렇다. 오히려 창의성을 보이면 집단에서 이질적인 취급을 받기도 한다. 민항 조종사의 업무가 '절차(PROCEDURE)'에 맞게 항공기 운항을 하는 것이지 창의적으로 비행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항기로 창의적인 비행을 한다면 아무도 그 비행기에 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보수적인 분위기는 회사 전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교육생이지만 정장 차림으로 회사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정장은 색이나 체크무늬등이 들어간 것은 안되고 검은색이나 짙은 감색 계열만 입어야 했다. 구두와 벨트도 검은색만 신어야 했고 와이셔츠도 푸른색이나 회색 등 색이 들어간 것을 입어선 안됐다. 오로지 흰색 와이셔츠만 입어야 했다. 매일 훈련팀장님에게 출석이나 인적사항들을 보고해야 했다. 교육을 받을 때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물론 교육을 해주시는 분들은 현직 기장님들이셨다. 교육생으로 교육만 받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사무(또는 잡무)를 해야 할 경우들도 많았다. 병역을 마치고 회사에 입사했지만 그런 경직된 분위기는 군대와는 또 달랐다. 

드라마 미생을 보면 주인공 장그래가 갓 회사에 들어가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그 모습들을 보며 많은 공감을 했다. 딱 내가 그랬으니까. 그 시절 나는 모든 것을 새로 적응해야 했다. 새 회사, 새 분위기, 짐처럼 부담이되는 상황, 낯선 서울생활... 사회생활은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하다.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잘 맞는 '가면'을 어울리게 쓰고 내면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특히나 교육생 신분에서는 말이다. 이것은 회사의 윗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동기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선긋기가 필요했다. 

편조 

편조 
지휘관이 전투편성을 실시함에 있어서 한 특정 임무 또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특수하게 계획된 부대의 구성
- 네이버 군사용어 사전

조종사들이 쓰는 용어중에 '편조'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군사용어로 쓰이던 어원적 배경이 있는 것 같다. 항공사에서는 같이 비행하는 조를 '편조'라고 한다. "오늘은 A기장과 B부기장이 편조로 임무를 수행한다"는 식으로 사용된다. 미국에 가기 전에 동기들 중에 편조를 정해야 했다. 즉, 둘 씩 짝찌어 교육을 같이 받을 사람을 정해야 했다. 비행 교육은 편의상 2인 1조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명이 교관과 동승해 비행을 배우고, 다른 한 명은 뒷좌석에서 어떻게 하는지 어깨너머로 배우고, 그 교육이 끝나면 자리 바꿔서 또 한 번 교육을 받는 그런 식이다. 이렇게 뒷좌석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교육생의 훈련을 지켜보는 것을 "백싯(Back-Seat)한다"라고 표현했다. 

미국에 가기 전 동기들은 서로서로 탐색전을 하며 어떤 사람과 편조를 할지 눈치싸움을 펼쳤다. 서로 경쟁하며 누구를 이겨야 게임에서 승리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조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편조와 같이 살면서 동거동락을 같이 해야 했다. 서로 마음이 잘 맞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과 편조를 하는 것이 좋았다. 

모두들 비행 교육에 적응을 잘 할것같은 사람과 편조하기를 원했다. 편조 중 한 사람이 진도가 늦거나 낙오하게 되면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암묵적으로 편조를 정하는 동기들이 생겼다. 하지만 내게 편조를 요청하는 친구는 없었다. 마음이 잘 맞고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동기 윤성범(가명)에게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어 같이 편조하자고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사실 편조를 다른 사람과 하기로 결정해서... 미안하다." 라며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동기는 짝수였다는 것이다. 

최상훈(가명)은 동기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친구였다. 외모도 연예인을 닮아서 타 직군 여자 동기들에게 인기도 많았고 운동도 잘했다. 외국에서 대학을 나와 영어도 네이티브 스피커 못지않게 잘했다. 집도 서울의 부촌에 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모든 걸 다 갖춘 친구였다. 어느 날 뜻밖에도 이 친구가 내게 말 좀 하자고 했다. 

"우리 같이 편조하지 않을래?" 

나는 사실 이 친구와 편조를 할 것을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사교성좋고 외향적이며 사회생활 잘하는 그는 누구나 편조를 하고 싶어 하는 친구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 비행을 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이 친구는 별 힘들이지 않고 비행교육도 잘 받을 것 같았다. 이 친구가 왜 내게 편조를 하자고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게 나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편조 제출기한이 왔고 우리 동기들은 각자 서로가 정한 편조를 운항훈련팀장님께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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